가사를 처음 읽었을 때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이것이 한 사람의 목소리처럼 들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분명 랩의 형식은 누군가를 향한 디스에 가깝다. 그러나 한 줄씩 뜯어보면 이상하게도 화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익숙한 장소가 떠오른다. 인터넷 커뮤니티의 댓글창, 익명 게시판의 글 목록, 짧고 날 선 조롱들이 빠르게 소비되고 사라지는 화면.
「북극 펭귄」의 가사는 하나의 완성된 주장이라기보다, 인터넷 사회에 떠도는 말들의 파편처럼 보인다. 정치적 비난, 도덕적 낙인, 범죄를 끌어온 조롱, 가족과 관계를 향한 저주, 우스꽝스러운 비유와 밈. 각각의 문장은 마치 어디선가 본 적 있는 커뮤니티 글 같다. 단어는 과격하고, 이미지는 선명하며, 말은 빠르게 상대를 겨냥한다. 하지만 그 말들이 향하는 목적지는 흐릿하다.
인터넷의 언어는 종종 이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누군가를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비판보다 조롱에 가깝다. 정의를 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분노를 소비한다. 풍자처럼 보이지만, 어느 순간부터는 폭력이 된다. 중요한 것은 진실이 아니라 반응이고, 맥락이 아니라 속도이며, 책임이 아니라 재미다.
그래서 이 가사의 화자는 한 명의 래퍼라기보다 커뮤니티 전체의 목소리에 가깝다. 문장들은 각기 다른 게시글에서 잘려 나온 댓글처럼 이어진다. 누군가는 정치 이야기를 꺼내고, 누군가는 범죄자를 끌고 오며, 누군가는 가족을 모욕하고, 누군가는 이상한 동물 비유로 웃음을 만든다. 이 모든 말들이 한데 섞이면서 하나의 거대한 소음이 된다.
제목인 「북극 펭귄」은 이 점에서 의미심장하다. 북극에는 펭귄이 없다. 그럼에도 우리는 북극의 펭귄을 상상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을 있는 것처럼 말하고,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을 확신에 차서 떠든다. 인터넷 사회의 많은 말들도 그렇다. 대상에 대해 충분히 알지 못하면서도 쉽게 단정하고, 맥락을 모르면서도 빠르게 심판한다. 북극에 가서 펭귄을 찾는 사람처럼, 우리는 엉뚱한 장소에서 엉뚱한 확신을 품는다.
그림 속 펭귄들도 그런 인터넷 사회의 축소판처럼 보인다. 폭력의 주체가 있고, 그 폭력에 올라탄 동조자가 있다. 도망치는 피해자가 있고, 멀찍이서 지켜보는 방관자가 있다. 그들은 모두 펭귄처럼 보이지만, 같은 방식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누군가는 공격하고,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본다.
인터넷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먼저 말을 던진다. 누군가는 거기에 올라탄다. 누군가는 조롱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들은 그저 지켜본다. 직접 손을 대지 않았다는 이유로 자신은 폭력과 무관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켜보는 행위 역시 때로는 장면을 완성한다. 조회수와 추천, 캡처와 공유, 침묵과 관망은 모두 그 폭력을 더 오래 지속시키는 배경이 된다.
이 가사가 불편한 이유는 단순히 표현이 거칠기 때문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거친 표현들이 너무 익숙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미 이런 말들을 알고 있다. 어디선가 봤고, 어쩌면 웃었고, 어쩌면 지나쳤다. 한 줄 한 줄은 과장되어 있지만, 완전히 낯설지는 않다. 그 익숙함이 이 작품을 우스꽝스럽게 만들면서도 동시에 찝찝하게 만든다.
마지막에 남는 것은 질문이다.
북극의 펭귄들.
그들은 어떻게 사는가.
어쩌면 이 질문은 펭귄에 대한 것이 아니다.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존재하지 않는 책임감으로, 존재하지 않는 얼굴을 한 채 살아가는 우리에 대한 질문이다. 인터넷 속에서 우리는 모두 잠시 펭귄이 된다. 누군가는 운전대를 잡고, 누군가는 옆자리에서 웃고, 누군가는 도망치고, 누군가는 화면 밖에서 지켜본다.
그리고 화면이 꺼진 뒤에도, 그 말들은 어딘가에 남아 있다.
※ 위 글은 AI의 도움을 받아 첨삭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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