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글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한 사람이 타국에서 겪은 불쾌한 경험을 적은 수기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낯선 나라에서, 낯선 언어로, 낯선 사람들과 소통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피로를 동반한다. 특히 상대의 말투가 어딘가 어긋나 있다고 느껴질 때 우리는 쉽게 날이 선다. 나 역시 외국에 살다 온 경험이 있기에 그 감각을 모르는 바가 아니다. 외국어를 쓴다는 것은 단순히 문장을 조립하는 행위를 넘어, 상대의 표정과 말끝, 침묵과 거리감까지 함께 읽어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글은 이내 기묘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처음에는 “무례한 말투가 불쾌했다”는 서술처럼 보였다. 하지만 읽어 내려갈수록 그것은 무례함에 대한 합리적인 비판이라기보다, 자신이 불쾌했던 모든 순간을 하나의 예정된 결론으로 몰아가는 강박처럼 보였다. 상대가 영어로 말을 걸면 내 일본어를 무시한 것이고, 일본어로 말을 걸면 외국인을 신기해한 것이며, 한국어를 써보면 나를 관광객으로 소비한 것이고, 친근하게 굴면 선을 넘은 것이 된다.
그렇게 되면 타인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말을 걸어도 틀리고, 걸지 않아도 틀린다. 영어를 해도, 일본어를 해도 틀린다. 한국어를 써보려 노력해도 틀리고, 조심스럽게 행동해도 틀린다. 결국 그 글 안에서 타인은 이미 유죄인 채로 등장할 뿐이다. 그들이 실제로 무엇을 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오직 글쓴이가 그것을 어떻게 ‘느꼈느냐’다.
물론 감정은 중요하다. 누군가가 기분 나빴다면, 그 감정 자체를 부정할 수는 없다. 하지만 감정은 사실의 출발점일 수는 있어도 곧바로 결론이 될 수는 없다. 내가 불쾌했다는 사실과 상대가 나를 무시했다는 주장은 별개다. 내가 어떤 말투를 거슬리게 느꼈다는 것과 그 말투에 반드시 차별의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다는 것 역시 다르다. 그 사이에는 맥락이 있고, 오해가 있고, 서툰 친절이 있으며, 때로는 자기 자신의 자존심이 개입한다.
그 글에는 바로 그 사이, 즉 '맥락'을 짚어내려는 최소한의 유예가 없었다.
불쾌함이 차별로 단정되기 전에 던졌어야 할 질문들은 가볍게 생략되어 있었다. 상대가 정말 외국인이라서 그렇게 대했는가. 같은 상황의 일본인 손님에게도 다르게 대했는가. 그 가게의 접객 방식은 원래 그런가. 직원이 무례했던 것인가, 아니면 그저 서툴렀던 것인가. 혹은 글쓴이 자신이 이미 예민해진 상태에서 모든 장면을 적대적으로 해석한 것은 아닌가. 질문이 사라진 자리를 채운 것은 오직 확신이었다.
내가 불편했던 것은 바로 그 확신의 태도였다. 외국인으로서의 소외감을 말하는 듯한 행간 뒤로, 실은 또 다른 종류의 멸시가 넘실거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어가 어눌한 사람을 향한 멸시, 관광객을 향한 멸시, 일본어를 잘하는 외국인을 향한 냉소, 서툰 한국어를 써보려는 일본인을 향한 조롱, 영어로 안내하려는 직원을 향한 빈정거림까지. 처음에는 예절을 논하는 것 같았지만, 끝에 가서는 거의 모든 이가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해 있었다.
그 지점에서 글은 설득력을 잃는다.
무례를 비판하려면 스스로 무례하지 않아야 한다. 차별을 비판하려면 타인을 납작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상대를 동등한 인간으로 대하라고 요구하려면, 자신 역시 타인을 동등한 인간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하지만 그 글은 끊임없이 누군가를 범주화하고 납작하게 만들었다. 일본인은 외국인을 신기해하는 존재로, 관광객은 어눌하게 소비되는 존재로, 일본어를 하는 외국인은 허세를 부리는 존재로, 반대 의견을 말하는 사람은 뉘앙스를 모르는 존재로 처리되었다. 그러면서 글쓴이는 자신만이 정확한 뉘앙스를 알고, 현실을 보며, 일본 사회를 관통하고 있다는 우월적 위치에 섰다.
나는 이런 글을 접할 때마다 기묘한 피로를 느낀다.
겉으로는 예민함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우월감을 숨기고 있는 글.
겉으로는 차별을 말하지만 실제로는 타인을 깎아내리며 자신을 방어하는 글.
겉으로는 경험담의 형식을 취하지만 사실은 이미 결론이 정해진 판결문 같은 글.
이러한 글은 독자를 설득하지 못한다. 다만 한 사람의 분노가 얼마나 독단적으로 번질 수 있는지를 증명할 뿐이다.
물론 외국에서의 삶은 단순하지 않다. 언어가 통한다고 해서 모든 문이 열리는 것은 아니다. 말은 통하지만 마음은 통하지 않을 때가 있고, 정중한 표현 속에서도 보이지 않는 서늘한 거리가 느껴질 때가 있다. 외국인으로 산다는 것은 때때로 설명하기 어려운 미묘한 불편함을 견뎌내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불편함을 공론화하는 일은 분명 필요하다.
하지만 그 불편함을 소묘하는 방식 역시 중요하다.
내가 겪은 불쾌함을 말하는 것과, 그 불쾌함을 근거로 한 사회 전체를 단정하는 것은 다르다. 한 직원의 무례를 지적하는 것과, 특정 국가의 구성원을 한 덩어리로 묶어 비난하는 것은 다르다. 외국인을 어린아이처럼 대하는 시선을 비판하는 것과, 일본어가 서툰 이들을 조롱하는 것은 엄연히 다르다.
그 미묘한 차이를 잃어버리는 순간, 비판은 쉽게 혐오로 변질된다.
나는 그 글에서 바로 그 파국을 보았다. 비판이 혐오로 바뀌는 순간. 경험담이 독단적인 자기정당화로 바뀌는 순간. 상처받은 주체가 자신이 받은 상처를 면죄부 삼아 타인을 함부로 다뤄도 된다고 믿기 시작하는 순간을.
그래서 화가 났다.
단순히 의견이 달라서가 아니었다. 일본 사회에 차별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싶어서도 아니다. 어느 사회에나 차별은 있고, 무례한 사람은 존재하며, 외국인을 기이한 방식으로 소비하는 시선도 엄연히 있다. 그런 문제는 분명히 수면 위로 끌어올려 말해야 한다. 다만 그 글은 문제를 말하는 척하면서, 정작 그 본질을 흐리고 있었다. 실제로 논의해야 할 섬세한 지점들을 전부 자기 분노의 연료로 소진해버리고 있었다. 무례한 접객, 외국인에 대한 과도한 호기심, 언어적 위계, 관광객을 향한 편견 같은 복잡한 의제들이 있었지만, 글은 그것들을 차분히 짚어내지 않았다. 대신 전부 하나의 거대한 감정의 늪으로 밀어 넣었다.
“내가 불쾌했으므로, 당신들은 유죄다.”
그 오만한 문장이 글 전체의 기저에 깔려 있는 듯했다. 하지만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타인의 친절은 서툴고 부담스러울지언정 모욕이 아닐 수 있으며, 거친 말투는 미숙한 접객일 뿐 차별이 아닐 수 있다. 서툰 외국어로 말을 건네는 호의 역시 어색해 보일지언정 조롱의 대상이 될 수는 없다.
불쾌함은 소중한 신호다.
하지만 불쾌함이 언제나 진실을 담보하지는 않는다.
때로 우리는 자신이 느낀 감정을 의심해보아야 한다. 상대가 정말 나를 낮춰본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미 낮춰 보일까 봐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상대가 정말 선을 넘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이미 방어적인 마음으로 모든 말끝을 날카롭게 가공해 듣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상대가 나를 외국인으로 소비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외국인으로 비춰진다는 사실 자체를 견디지 못했던 것인지.
이 질문들은 불편하다. 하지만 그렇기에 필요한 질문이다.
그 성찰을 생략한 글은 독해가 아니라 공격이 된다. 그리고 공격으로 변한 글은 결국 자기 자신의 밑바닥을 폭로하기 마련이다. 무엇을 혐오하는지, 무엇에 상처받았는지, 무엇을 인정하고 싶지 않은지, 그리고 어떤 부류의 인간들을 아래로 내려다보고 싶어 하는지.
내가 목격한 글은 그랬다.
처음에는 누군가의 불쾌한 경험담으로 시작했지만, 끝에 가서는 타인을 향한 경멸이 짙게 배어 있었다. 읽고 나서 남은 것은 일본 사회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이 아니었다. 외국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섬세한 기록도 아니었다. 그저 한 개인이 거대한 분노에 함몰되어 있다는 사실. 그리고 그 화가 정당한 과녁을 잃고 주변의 무고한 이들에게까지 무차별적으로 번지고 있다는 서글픈 사실뿐이었다.
좋은 비판은 대상을 정확히 겨냥한다.
반면 나쁜 비판은 주변을 모두 불태운다.
그 글은 명백히 후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나는 그 글을 읽고 오래도록 얹힌 듯 불편했다. 누군가의 경험이 불쾌해서가 아니라, 그 경험이 너무나 손쉽게 타인에 대한 멸시로 치환되는 장면을 목격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글이 대중에게 “맞아, 나도 그렇게 느꼈어”라는 해방감으로 소비될 때, 우리는 또 하나의 게으른 일반화를 학습하게 된다.
차별을 비판하는 척하면서 또 다른 차별을 생산하고,
무례를 비판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무례를 정당화하며,
상처를 말하는 척하면서 타인에게 더 깊은 상처를 입히는 글.
나는 그런 글을 결코 신뢰할 수 없다.
결국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이것이다.
기분 나쁠 수 있다. 충분히 불쾌했을 수 있다.
어떤 직원은 실제로 악의적으로 무례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쾌함은 면허가 아니다.
그 감정이 타인을 멋대로 재단하고 심판할 권리를 부여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상처받았다는 이유가, 타인을 함부로 멸시해도 된다는 면죄부가 될 수는 없다.
경험은 존중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경험이 곧 진실의 전부는 아니다.
그리고 어떤 글은, 바로 그 당연한 사실을 망각하는 순간부터 지리멸렬해진다.
※ 위 글은 AI의 도움을 받아 첨삭하였습니다.
'일상\日常 > 일기\日記' 카테고리의 다른 글
| 북극의 펭귄들은 어떻게 사는가 (0) | 2026.05.30 |
|---|---|
| 인간실격 (0) | 2023.08.15 |
| 20210915 (0) | 2021.09.15 |